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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판 메이텐스 작 '마리아 테레지아의 초상화'(1759년).
17세기 유럽을 주름잡았던 프랑스를 이끌며 '태양왕'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했던 루이 14세는 이 와인을 가리켜 "왕을 위한 와인이자, 와인의 왕"이라고 극찬했습니다. 18세기 재위했던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이 와인을 선물받자 뛸 듯이 기뻐하며 "이 와인을 만든 땅에 축복이, 이 와인을 보낸 여인에게 축복이, 이 와인을 마시는 내게 축복이 있으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죠. 19세기 대영제국 최고 전성기 시절, 재위 기간만 63년7개월에 이르는 빅토리아 여왕은 이 와인을 무척 사랑해 매해 생일 선물로 배달되는 12병을 목놓아 기다렸습니다. 당대 제왕들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이 와인은, 유명 마이너스통장 서류 한 예술 작품에도 등장합니다. 독일의 문호, '바이마르의 현인'으로 불린 괴테의 걸작 '파우스트'가 대표적입니다. 술집에 모인 사람들이 달콤한 술을 원하자 악마 메피스토가 식탁에 구멍을 뚫어 솟아나게 하는 와인입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에서는 백작 부인으로 변장한 여주인공이 부르는 노래 가사에 이 와인이 나오죠.
이쯤 하나은행 공인인증서 되면 와인 애호가들은 이 와인의 정체를 알아차리셨을 겁니다. '달콤한 황금'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세계 3대 스위트(디저트) 와인, 세계 3대 귀부(貴腐) 와인 등 순위를 다투는 거의 모든 카테고리에서 빠지지 않는 와인, 헝가리의 축복 또는 보물이라 불리는 토카이(Tokaj)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귀하고 사랑받은 토카이 와인을 너무도 엽서카드 사랑해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보존·관리하는 법령을 제정하고 보호한 사람이 '유럽의 어머니'로 불린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철의 여인'이라 불렸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왜 그토록 토카이 와인을 아꼈던 것일까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젊은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리 앙투아네트(프랑 신한캐피탈전세보증금 스 왕비)와 요제프 2세(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신성로마제국 황제) 등 16명의 자녀를 낳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순수 혈통입니다. 1717년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의 장녀로 태어났는데,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와 볼터치를 한 듯 장밋빛 뺨이 유독 돋보였다고 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났던 시 아파트전세금대출 기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폴란드와 이탈리아 일부 등 사상 최대의 영지를 소유한 막강한 권력의 가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주변에서는 대놓고 드러내진 않더라도 호시탐탐 합스부르크 왕가의 땅과 재산을 노렸죠.
하지만 어린 마리아 테레지아는 유복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 당연시되는 정략결혼을 하지 않고, 불과 여섯 살이던 1723년 일찌감치 만난 운명의 사랑 로렌 공국(현 프랑스 지역)의 후계자 프란츠 슈테판과 10여 년 연애한 끝에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혼인으로 가문의 영향력을 유지하던 당시로서는 무척 드문 연애결혼이었습니다.
하지만 연애결혼의 대가는 빠르게 찾아왔습니다. 결혼 4년 뒤인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하며 고작 스물세 살이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왕가를 책임지게 됐거든요. 당시 여성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연애결혼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여성을 우습게 여긴 주변 열강들이 당장이라도 이빨을 드러내고 오스트리아를 찢어 가질 기회만 엿보았고, 결국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합니다.
당장 마리아 테레지아의 평생 숙적이 되는 프로이센 왕국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의 중요 농업지대였던 슐레지엔 지방(현 폴란드~체코)을 침공합니다. 이듬해(1741년)엔 바이에른이 보헤미아도 침략하죠.
아버지를 여읜 마리아 테레지아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생존을 위해 매일 중신들과 속성으로 정치와 외교를 배웠다고 합니다. 이때 그녀는 그 바쁜 시간 중에도 특이하게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반드시 매일 승마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승마는 단순한 체력 단련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당대 유럽 역사의 중심에 서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귀부병에 감염된 귀부포도. 알맹이 일부가 감염돼 변색되고, 표면이 쭈글쭈글해졌다. 껍질에 구멍이 생기면서 햇빛을 받은 속알맹이의 수분이 증발된다.
'이방인' 마리아 테레지아 지지한 헝가리
당시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였습니다. 하지만 인종도 언어도 달랐던 데다 오스트리아의 오랜 적국인 튀르키예와 협력국이기도 했죠. 이 때문에 열강들은 오스트리아를 도울 리 없을 것이라 여기고 헝가리를 과소평가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승마는 바로 이 부분을 파고든 전략이었습니다. 그녀가 헝가리군을 우군으로 삼으려면 그 나라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헝가리 국민과 진심으로 하나가 돼 신뢰를 얻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한 비책이 바로 승마였습니다. 헝가리인들은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의 침략 이후 말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습니다. 그들에게 '인종도 언어도 다른 외세의 지배자'가 아닌 '우리의 왕'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직접 말을 타고 달리는 늠름한 모습이 필요했던 겁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1741년 6월,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시 헝가리 수도였던 프레스부르크(현 브라티슬라바)에서 대관식을 거행합니다. 헝가리 민족 의상 차림으로 식이 열리는 언덕 위 대성당까지 직접 능숙하게 말을 몰아 행진했죠. 헝가리 국민의 환호성 속 그녀는 아직 어린 장남 요제프를 가슴에 안고 외칩니다. "여러분! 헝가리 왕국, 왕관, 국민, 아이들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인생은 역사가 잘 말해줍니다. 그녀는 끝내 슐레지엔 지역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당시 흔했던 전쟁보다 내치에 힘쓰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당대의 최강국 반열에 올려놨습니다. 하지만 열강들은 여전히 호시탐탐 오스트리아 제국을 노렸고, 여제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항상 건강하고 젊은 모습을 연출·과시했다고 합니다.
젊음과 건재 과시하던 그녀가 즐긴 와인
이런 강박에 시달린 마리아 테레지아가 즐겨 마신 와인이 바로 토카이 와인입니다. 당시 토카이 와인은 실제로 소화기·신경 계통의 약으로 쓰였고, 그 신비로운 맛 때문에 '불로장생약'으로도 불렸습니다. 그녀는 매일 아침 궁의(宮醫)의 처방을 받아 토카이 와인을 마셨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는 것과 비슷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와인은 무엇이 특별한 것이었을까요? 토카이 와인은 '포도를 귀하게 부패시킨다'는 뜻의 귀부(貴腐·영어로는 Noble Rot) 와인으로 불립니다. 곰팡이의 일종인 귀부병에 감염된 포도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체에 해가 되거나 불편한 풍미를 만들어내진 않습니다.
단지 이 병은 포도 알맹이 껍질을 갉아먹어서 속살이 드러나게 합니다. 결국 포도는 낮동안 햇볕 때문에 수분이 쉽게 증발돼 쭈글쭈글한 상태로 수확되죠. 이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어떨까요? 생산량은 극적으로 적어지지만, 일반 포도로 만드는 와인보다 수분이 적다 보니 훨씬 달콤한 와인이 만들어집니다.
헝가리에서는 귀부균에 감염돼 마른 포도를 아수(Aszu)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런 포도로 만든 스위트 와인 레이블에는 토카이 아수(Tokaji Aszu)라고 적혀 있습니다. 토카이 와인은 당도에 따라 '5푸토뇨스(Puttonyos)'와 '6푸토뇨스'로 나뉘는데, 푸토뇨스는 '푸토니(Puttony)'라고 부르는 이 동네 포도 수확용 통(용량 25㎏)의 복수형 명사입니다. 5푸토뇨스는 아수 포도 다섯 통, 6푸토뇨스는 아수 포도 여섯 통으로 와인을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숫자가 높을수록 당도가 더 높겠죠. 5푸토뇨스 와인은 1ℓ당 당분이 120g, 6푸토뇨스는 150g이나 됩니다.
맛은 어떨까요? 사과, 라임, 레몬, 복숭아, 살구, 모과, 파인애플 등 시트러스류 과일부터 단맛이 강한 열대과일까지 갖가지 과일향과 함께 꿀, 견과, 바닐라 등 다채로운 풍미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단맛이 강하지만 주 포도품종인 푸르민트(Furmint) 특유의 강한 신맛 덕분에 끈적임이 없고 경쾌하게 느껴집니다. 당도와 산도의 밸런스가 좋다는 뜻인데, 처음 접하는 대부분이 '단술은 싫다'고 했다가 '어? 나 단술 좋아했네?'라고 자기도 모르게 고백하게 되는 묘한 맛입니다.
작자 미상 '헝가리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1750년께).
여제의 토카이 와인을 향한 후원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을 향한 강력한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헝가리의 주요 상품인 토카이 와인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보호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가장 먼저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소비될 토카이 와인을 일정량 확보하고, 이를 위한 왕실 저장고를 별도로 운영했습니다. 이는 오스트리아의 선진 문화를 동경했던 전 유럽 귀족들이 토카이 와인을 찾게 만드는 일종의 광고 효과를 불러옵니다.
또 토카이 지역의 와인 생산을 국가적으로 통제하며 품질을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생산, 유통, 가격 설정이 철저히 관리·감독되는 토카이 와인은 곧 엄청난 인기를 끕니다. 여기에 헝가리 내에서도 특정 가문이나 왕실만이 이를 유통할 수 있도록 제한했습니다. 유명성을 떨어뜨리는 유사품이나 정수를 빼먹은 모조품이 생산되는 것을 원천 차단한 셈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당대 유럽을 주무르던 오스트리아와 타국의 교류에 토카이 와인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실제로 그녀가 러시아 황제 예카테리나 2세에게 특별히 숙성된 토카이 와인을 선물하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귀한 러시아 모피와 보석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무려 1365년에 설립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였던 빈대학에 '헝가리의 토카이 와인을 연구하라'고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에 와인을 연구하라고 지시한 최초의 제후인 셈인데, 실제로 본인도 와인을 즐기면서 그 오묘한 빛깔과 맛에 현혹돼 비밀을 파헤치고 싶었던 것으로 풀이됩니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에 보답하듯 지금도 헝가리 일부 와이너리에서는 최고급 토카이 와인에 그녀의 이름을 따 'Maria Theresia Cuvee'를 따로 적기도 합니다.
어머니와 아내에게 선물할 만한 와인
이쯤 되면 어쩌면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토카이 와인은 단순한 와인을 넘어 여제로서 자신의 삶의 시작을 떠올리는 매개가 아니었을까요. 좌절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때면 '이것만 마시면 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심정으로 토카이 와인을 마시고, 전 유럽을 상대로 당시로서는 걸음걸이만 삐끗해도 화제가 되는 여성의 몸으로 정치와 외교를 동반한 사투를 벌였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80년 11월 자신의 자녀들에게 일일이 작별인사를 건네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헝가리 재상을 불러 자신을 사랑해준 헝가리를 향한 별도의 감사 메시지도 남겼다고 합니다. 어지러운 시기에 태어나고 어린 나이에 여제가 돼야 했던 그녀의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현대의 우리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역사가 된 그녀의 삶을 수백 년 뒤인 지금 살펴보면, 그 어떤 어려움에도 가족을 위해 필사적으로 받아들이고 맞부딪치며 희생해온 우리의 어머니가 떠오릅니다. 실제로 그녀의 가장 유명한 별명인 대모후(The Great Mother)는 그녀가 정치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국가와 가족을 보호하는 강한 어머니상을 상징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입니다.
어머니나 아내에게 선물할 와인으로 토카이 와인만 한 게 없습니다. 굳이 말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달콤하고 진득한 금빛 방울이 전하는 맛의 깊이 속에서 어머니를 향한 애정과 경의가 전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흥미로운 와인 이야기를 재밌고 맛있게 풀어드립니다.
[전형민 기자]
17세기 유럽을 주름잡았던 프랑스를 이끌며 '태양왕'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했던 루이 14세는 이 와인을 가리켜 "왕을 위한 와인이자, 와인의 왕"이라고 극찬했습니다. 18세기 재위했던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이 와인을 선물받자 뛸 듯이 기뻐하며 "이 와인을 만든 땅에 축복이, 이 와인을 보낸 여인에게 축복이, 이 와인을 마시는 내게 축복이 있으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죠. 19세기 대영제국 최고 전성기 시절, 재위 기간만 63년7개월에 이르는 빅토리아 여왕은 이 와인을 무척 사랑해 매해 생일 선물로 배달되는 12병을 목놓아 기다렸습니다. 당대 제왕들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이 와인은, 유명 마이너스통장 서류 한 예술 작품에도 등장합니다. 독일의 문호, '바이마르의 현인'으로 불린 괴테의 걸작 '파우스트'가 대표적입니다. 술집에 모인 사람들이 달콤한 술을 원하자 악마 메피스토가 식탁에 구멍을 뚫어 솟아나게 하는 와인입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에서는 백작 부인으로 변장한 여주인공이 부르는 노래 가사에 이 와인이 나오죠.
이쯤 하나은행 공인인증서 되면 와인 애호가들은 이 와인의 정체를 알아차리셨을 겁니다. '달콤한 황금'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세계 3대 스위트(디저트) 와인, 세계 3대 귀부(貴腐) 와인 등 순위를 다투는 거의 모든 카테고리에서 빠지지 않는 와인, 헝가리의 축복 또는 보물이라 불리는 토카이(Tokaj)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귀하고 사랑받은 토카이 와인을 너무도 엽서카드 사랑해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보존·관리하는 법령을 제정하고 보호한 사람이 '유럽의 어머니'로 불린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철의 여인'이라 불렸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왜 그토록 토카이 와인을 아꼈던 것일까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젊은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리 앙투아네트(프랑 신한캐피탈전세보증금 스 왕비)와 요제프 2세(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신성로마제국 황제) 등 16명의 자녀를 낳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순수 혈통입니다. 1717년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의 장녀로 태어났는데,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와 볼터치를 한 듯 장밋빛 뺨이 유독 돋보였다고 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났던 시 아파트전세금대출 기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폴란드와 이탈리아 일부 등 사상 최대의 영지를 소유한 막강한 권력의 가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주변에서는 대놓고 드러내진 않더라도 호시탐탐 합스부르크 왕가의 땅과 재산을 노렸죠.
하지만 어린 마리아 테레지아는 유복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 당연시되는 정략결혼을 하지 않고, 불과 여섯 살이던 1723년 일찌감치 만난 운명의 사랑 로렌 공국(현 프랑스 지역)의 후계자 프란츠 슈테판과 10여 년 연애한 끝에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혼인으로 가문의 영향력을 유지하던 당시로서는 무척 드문 연애결혼이었습니다.
하지만 연애결혼의 대가는 빠르게 찾아왔습니다. 결혼 4년 뒤인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하며 고작 스물세 살이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왕가를 책임지게 됐거든요. 당시 여성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연애결혼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여성을 우습게 여긴 주변 열강들이 당장이라도 이빨을 드러내고 오스트리아를 찢어 가질 기회만 엿보았고, 결국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합니다.
당장 마리아 테레지아의 평생 숙적이 되는 프로이센 왕국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의 중요 농업지대였던 슐레지엔 지방(현 폴란드~체코)을 침공합니다. 이듬해(1741년)엔 바이에른이 보헤미아도 침략하죠.
아버지를 여읜 마리아 테레지아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생존을 위해 매일 중신들과 속성으로 정치와 외교를 배웠다고 합니다. 이때 그녀는 그 바쁜 시간 중에도 특이하게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반드시 매일 승마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승마는 단순한 체력 단련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당대 유럽 역사의 중심에 서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귀부병에 감염된 귀부포도. 알맹이 일부가 감염돼 변색되고, 표면이 쭈글쭈글해졌다. 껍질에 구멍이 생기면서 햇빛을 받은 속알맹이의 수분이 증발된다.
'이방인' 마리아 테레지아 지지한 헝가리
당시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였습니다. 하지만 인종도 언어도 달랐던 데다 오스트리아의 오랜 적국인 튀르키예와 협력국이기도 했죠. 이 때문에 열강들은 오스트리아를 도울 리 없을 것이라 여기고 헝가리를 과소평가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승마는 바로 이 부분을 파고든 전략이었습니다. 그녀가 헝가리군을 우군으로 삼으려면 그 나라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헝가리 국민과 진심으로 하나가 돼 신뢰를 얻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한 비책이 바로 승마였습니다. 헝가리인들은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의 침략 이후 말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습니다. 그들에게 '인종도 언어도 다른 외세의 지배자'가 아닌 '우리의 왕'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직접 말을 타고 달리는 늠름한 모습이 필요했던 겁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1741년 6월,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시 헝가리 수도였던 프레스부르크(현 브라티슬라바)에서 대관식을 거행합니다. 헝가리 민족 의상 차림으로 식이 열리는 언덕 위 대성당까지 직접 능숙하게 말을 몰아 행진했죠. 헝가리 국민의 환호성 속 그녀는 아직 어린 장남 요제프를 가슴에 안고 외칩니다. "여러분! 헝가리 왕국, 왕관, 국민, 아이들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인생은 역사가 잘 말해줍니다. 그녀는 끝내 슐레지엔 지역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당시 흔했던 전쟁보다 내치에 힘쓰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당대의 최강국 반열에 올려놨습니다. 하지만 열강들은 여전히 호시탐탐 오스트리아 제국을 노렸고, 여제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항상 건강하고 젊은 모습을 연출·과시했다고 합니다.
젊음과 건재 과시하던 그녀가 즐긴 와인
이런 강박에 시달린 마리아 테레지아가 즐겨 마신 와인이 바로 토카이 와인입니다. 당시 토카이 와인은 실제로 소화기·신경 계통의 약으로 쓰였고, 그 신비로운 맛 때문에 '불로장생약'으로도 불렸습니다. 그녀는 매일 아침 궁의(宮醫)의 처방을 받아 토카이 와인을 마셨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는 것과 비슷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와인은 무엇이 특별한 것이었을까요? 토카이 와인은 '포도를 귀하게 부패시킨다'는 뜻의 귀부(貴腐·영어로는 Noble Rot) 와인으로 불립니다. 곰팡이의 일종인 귀부병에 감염된 포도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체에 해가 되거나 불편한 풍미를 만들어내진 않습니다.
단지 이 병은 포도 알맹이 껍질을 갉아먹어서 속살이 드러나게 합니다. 결국 포도는 낮동안 햇볕 때문에 수분이 쉽게 증발돼 쭈글쭈글한 상태로 수확되죠. 이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어떨까요? 생산량은 극적으로 적어지지만, 일반 포도로 만드는 와인보다 수분이 적다 보니 훨씬 달콤한 와인이 만들어집니다.
헝가리에서는 귀부균에 감염돼 마른 포도를 아수(Aszu)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런 포도로 만든 스위트 와인 레이블에는 토카이 아수(Tokaji Aszu)라고 적혀 있습니다. 토카이 와인은 당도에 따라 '5푸토뇨스(Puttonyos)'와 '6푸토뇨스'로 나뉘는데, 푸토뇨스는 '푸토니(Puttony)'라고 부르는 이 동네 포도 수확용 통(용량 25㎏)의 복수형 명사입니다. 5푸토뇨스는 아수 포도 다섯 통, 6푸토뇨스는 아수 포도 여섯 통으로 와인을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숫자가 높을수록 당도가 더 높겠죠. 5푸토뇨스 와인은 1ℓ당 당분이 120g, 6푸토뇨스는 150g이나 됩니다.
맛은 어떨까요? 사과, 라임, 레몬, 복숭아, 살구, 모과, 파인애플 등 시트러스류 과일부터 단맛이 강한 열대과일까지 갖가지 과일향과 함께 꿀, 견과, 바닐라 등 다채로운 풍미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단맛이 강하지만 주 포도품종인 푸르민트(Furmint) 특유의 강한 신맛 덕분에 끈적임이 없고 경쾌하게 느껴집니다. 당도와 산도의 밸런스가 좋다는 뜻인데, 처음 접하는 대부분이 '단술은 싫다'고 했다가 '어? 나 단술 좋아했네?'라고 자기도 모르게 고백하게 되는 묘한 맛입니다.
작자 미상 '헝가리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1750년께).
여제의 토카이 와인을 향한 후원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을 향한 강력한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헝가리의 주요 상품인 토카이 와인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보호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가장 먼저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소비될 토카이 와인을 일정량 확보하고, 이를 위한 왕실 저장고를 별도로 운영했습니다. 이는 오스트리아의 선진 문화를 동경했던 전 유럽 귀족들이 토카이 와인을 찾게 만드는 일종의 광고 효과를 불러옵니다.
또 토카이 지역의 와인 생산을 국가적으로 통제하며 품질을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생산, 유통, 가격 설정이 철저히 관리·감독되는 토카이 와인은 곧 엄청난 인기를 끕니다. 여기에 헝가리 내에서도 특정 가문이나 왕실만이 이를 유통할 수 있도록 제한했습니다. 유명성을 떨어뜨리는 유사품이나 정수를 빼먹은 모조품이 생산되는 것을 원천 차단한 셈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당대 유럽을 주무르던 오스트리아와 타국의 교류에 토카이 와인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실제로 그녀가 러시아 황제 예카테리나 2세에게 특별히 숙성된 토카이 와인을 선물하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귀한 러시아 모피와 보석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무려 1365년에 설립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였던 빈대학에 '헝가리의 토카이 와인을 연구하라'고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에 와인을 연구하라고 지시한 최초의 제후인 셈인데, 실제로 본인도 와인을 즐기면서 그 오묘한 빛깔과 맛에 현혹돼 비밀을 파헤치고 싶었던 것으로 풀이됩니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에 보답하듯 지금도 헝가리 일부 와이너리에서는 최고급 토카이 와인에 그녀의 이름을 따 'Maria Theresia Cuvee'를 따로 적기도 합니다.
어머니와 아내에게 선물할 만한 와인
이쯤 되면 어쩌면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토카이 와인은 단순한 와인을 넘어 여제로서 자신의 삶의 시작을 떠올리는 매개가 아니었을까요. 좌절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때면 '이것만 마시면 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심정으로 토카이 와인을 마시고, 전 유럽을 상대로 당시로서는 걸음걸이만 삐끗해도 화제가 되는 여성의 몸으로 정치와 외교를 동반한 사투를 벌였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80년 11월 자신의 자녀들에게 일일이 작별인사를 건네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헝가리 재상을 불러 자신을 사랑해준 헝가리를 향한 별도의 감사 메시지도 남겼다고 합니다. 어지러운 시기에 태어나고 어린 나이에 여제가 돼야 했던 그녀의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현대의 우리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역사가 된 그녀의 삶을 수백 년 뒤인 지금 살펴보면, 그 어떤 어려움에도 가족을 위해 필사적으로 받아들이고 맞부딪치며 희생해온 우리의 어머니가 떠오릅니다. 실제로 그녀의 가장 유명한 별명인 대모후(The Great Mother)는 그녀가 정치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국가와 가족을 보호하는 강한 어머니상을 상징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입니다.
어머니나 아내에게 선물할 와인으로 토카이 와인만 한 게 없습니다. 굳이 말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달콤하고 진득한 금빛 방울이 전하는 맛의 깊이 속에서 어머니를 향한 애정과 경의가 전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흥미로운 와인 이야기를 재밌고 맛있게 풀어드립니다.
[전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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